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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 코드: 더 비기닝

한국의 IT 업계 사람들, 특히 개발자들은 매년, 매 분기, 심하면 매달, 매주 회고를 하는 문화가 있다. 나도 회고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IT계의 거장인 빌 게이츠가 회고록을 책으로 냈다고 했을 때, 빌 게이츠가 생각한 스스로의 인생 평가가 매우 궁금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열혈 팬도 아니고, 빌 게이츠를 좋아하는 마음도 없었는데도 500페이지에 달하는 회고록은 정말 재미있었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고, 돈도 많고, 글도 잘 써…)

싹수가 남다른 트레이

*트레이는 게이츠 가족에서 빌 게이츠의 애칭이다.

카드 게임을 통해 나는 아무리 복잡하고 불가사의해 보이는 무엇이라도 결국에는 알아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배웠다. 세상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책은 할머니 댁에서 카드 게임을 하는 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세세하게 썼는데, 본인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정말 잘 회고한 것 같다. 그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고 나니 빌 게이츠라는 사람을 ‘세계 1위 부자’에서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은 부모와 선생님이 모든 답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점차 부모님과 선생님이 그렇지 않다고, 적어도 나를 만족시킬 만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정말 똑똑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식에 대한 확신 수준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서 나온 답을 믿기보다는 늘 나보다 성숙한 누군가의 답을 기대하는데 고작 9살의 나이에 저런 수준의 자기 확신이 가능한걸까? 신기했다. 그가 수학을 좋아한 이유도 ‘수학을 통해 다른 학문을 익히는 법을 깨달을 수 있어서’라고 했는데, 수포자 출신으로서 그 표현 자체가 신선했다. 수학을 배움의 치트키로 써먹었다는 그의 경험담을 들으니 수학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뒤늦게야 뿜뿜했다.

잘 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면?

그해 여름, 나는 한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20퍼센트 더 뛰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타고난 재능은 어느 정도 작용하고 헌신적인 노력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 전날보다 오늘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매일 끊임없이 집중하고 고심하며 얼마나 오랜기간 노력을 기울여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걸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타고난 재능이 있음에도 남들과 비교하며 나태하기는커녕, 진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삶의 태도였다. 정말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게 한 문장 한 문장에서 느껴진다.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자기만의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고, 스스로의 재능을 발견하는 모습, 눈 떠 있는 모든 시간을 프로그래밍에 쏟아붓는 모습 등. ‘세계 최고 부자’를 목표로 산 게 아니라, 진짜 본인의 열정을 집요하게 좇으며 사는 태도가 감명 깊었고, 배우고 싶었다.

내가 60살쯤 내 삶을 돌아본다면 총 몇 페이지나 쓸 수 있을까? 아마 100페이지를 채우기도 힘들지도… 열심히 살아온 만큼 돌아볼 것도 많아 500페이지를 꽉꽉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절 개발 이야기

1960년대에 처음 컴퓨터를 접하고 그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 신기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는 1960~70년대의 컴퓨터 환경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빌 게이츠가 열심히 썼던 알테어 8800

빌 게이츠가 열심히 썼던 알테어 8800

책을 다 읽고 넥슨컴퓨터박물관에 가서 직접 천공카드와 알테어 8800을 보고 왔는데 감회가 남달랐다. 베이직 예제 코드를 한 번 따라 쳐보면서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개발을 한 걸까…’싶었고, 그 시절 선배 개발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졌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를 처음 창업하던 부분을 읽을 때는 스타트업 재직자로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50년 전 이야기인데도 요즘 스타트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신기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뉴멕시코로 이주해 18개월밖에 안 된, 미래가 불투명한 회사에 운명을 맡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기에 채용된 그들을 보며 마이크로-소프트가 비로소 진짜 회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가 그 사진관에 데려간 '가족'은 우리 회사의 총원 12명 가운데 11명이었다.

초기 멤버들을 ‘가족’이라고 표현한 것도 굉장히 의외의 따뜻한 모먼트였다.

초기 MS 멤버들

초기 MS 멤버들

요즘 스타트업처럼 열댓 명 남짓한 직원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 귀엽게 느껴졌다. 회사의 덩치가 점점 커지던 시절, 초기 구성원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해졌다. 레이크사이드에서 시작했던 프로젝트성 작업들을 이어오다가 회사를 스케일업하면서 또 다른 국면의 경영적 어려움을 느꼈을 텐데, 그 계기와 이후 어떤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는지도 더 알고 싶어졌다.

2편을 기대하며...

『소스 코드: 더 비기닝』은 빌 게이츠의 자서전 3부 중 1편에 불과하다. 300페이지쯤 대학에 입학하고, 책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마이크로소프트 창업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앞날에 집중하면서 살았다.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수년후에나 이뤄질, 어쩌면 아예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획기적인 도약을 모색하는 일에 쓰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과거를 돌아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기억들을 하나씩 꿰맞춰 나가는 과정은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른이 되어 깨달은 경이로운 한 가지는 세월과 배움을 모두 걷어내고 보면 나라는 존재의 많은 부분이 이미 처음부터 갖춰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모로 나는 여전히 할머니 댁의 식탁에 앉아 할머니가 패를 돌리길 기다리던 여덟살 짜리 아이와 같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길 열망하는 어린 아이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책의 초반에 이야기했던 카드 게임이 다시 등장하며 마무리되는데, 빌 게이츠 삶의 1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배움’이 아닐까 싶었다. 정답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계속 발견해 나가는 여정.

그리고 패가 좋든 나쁘든, 잘하면 이길 수 있는 것처럼 내 손에 좋은 패가 있든 나쁜 패가 있든, 그저 열심히 살아봐야겠다.